유리발전사 KFGWA가 유리에대한 발전사에 대하여 알려드립니다.

우리나라 유리 발전사
나날이 발전하는 유리지금의 우리나라에서는 유리제품의 주 원료가 되는 규석, 규사, 석회석, 백운석과 같은 천연연료가
대량 산출되고 있으며, 그 질도 우수하고 제조 기술도 나날이 향상되고 있으므로 유리 산업은
더욱 발전할 것이며 이러한 산업화 과정에 의해 유리 조형의 대중화 시대를 맞이할 것이다.

5천년의 역사를 지닌 유리

유리는 인류최초의 인조보석으로 유리특유의 투광성, 다양한 색채의 발현성, 비교적 쉬운 성형성, 재생성을 비롯한 여러 가지 특성 때문에 예부터 제조되어 왔고, 보물시 되어왔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 면 유리는 5,00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는 증거가 있고, 비교적 광범위하게 보급되기 시작한 연대로 보더라도 3,500년 의 역사는 확실시된다. 이때 이집트와 중동의 메소포타미아에서 성행되었던 유리는 유럽과 중국에 전래되고, 중국을 거쳐 제품과 제조기술이 신라에 도래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시대에 비로소 유리의 제조가 시작된 것으로 여겨 진다. 그러나 고려청자와 이조백자의 융성으로 유리제조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로의 유입과, 국립유리 제조소

본격적으로 유리제품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1876년 문호개방 이후이며, 서울, 부산, 인천등지에 일본인을 비롯한 외국인이 창유리를 들여와 집을 짓기 시작하였고, 거울이나 유리병 등도 수입되기 시작하였다. 명동성당에 유리창이 끼워져 세인을 놀라게 한 것은 1898년의 일이었다. 이 당시 우리나라에서도 램프외피유리 정도는 가내수공업형태로 제조된 것으로 보이지만 1900년대에 들어와서 유리병의 수요가 급격히 늘어남에 따라 수입보다는 우리나라에서 직접 제조하여야 겠다는 근대화된 유리공업의 필요성을 절감에게 되었다.

이러한 욕구에 의하여 1902년 황족인 이용익이 러시아의 기술을 도입하여 국립유리 제조소를 설립하여 1903년 유리병 을 제조할수 있었으나 1904년의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 함으로서 큰 성과가 없이 패쇄 되었다. 따라서 그 후 유리 병의 공급은 일본인들에 의하여 전량 수입되었으나 1909년 황족 이재온이 서대문근처에 설립한 경성초자 제조소는 우여곡절 끝에 1913년 역시 황족인 이재현에 의하여 완공되어 유리병과 램프외피유리를 만들었으나 일본인들의 자본력 과 기술을 당할 수 없어 유명무실해지고 말았다.

유리공업의 발전

그 후 우리나라 유리공업은 일본인에 의하여 전담되다시피 했는데 1934년에는 19개, 1938년에는 24개의 유리공장이 가동되었다. 이때까지의 유리공업은 모두 도가니가마에 의한 수동식 제조시설로 된 소규모의 공장이었는데 1939년에 영등포 조선맥주공장(지금의 하이트맥주) 옆에 제 2 일본 초자주식회사가 연속식의 탱크가마용융로를 건설하고 근대식 자동제병시설을 갖추고 있었으나, 연료는 석탄을 이용한 발생로 가스를 사용하였으며 생산능력은 1일 64,000개의 맥주병, 매분 11개의 되술병으로 당시로는 비교적 큰 공장이었다.

해방직전에는 2차대전의 발발로 에너지원인 석탄의 공급난이 가중되어 거의 운휴상태였으며 해방 후에도 자재, 기술 의 부족으로 재 가동을 하지 못하고 1948년에 상호를 동양유리공업주식회사로 개칭하고 도가니가마를 축조하여 여러 임대회사로 운영되다가 1967년 말경 조선맥주주식회사(지금의 하이트)에 매각 소멸될 때까지 여러 종류의 용기들을 생산하였다.

해방을 전후하여 서울, 부산, 대구등 대도시에는 소규모의 도가니가마공장이 설립과 소멸을 거듭하여왔으나 기술과 원 자재 부족으로 처음에는 유리의 특성인 순환성을 이용한 파유리의 재생에 주력하면서 점차 원료배합에 의한 신제품개 발에 노력하였다.

판유리 공장의 설립과 유리공업의 근대화

그러나 대부분의 유리제품은 수입일변도였고 6.25동란에 의한 폐허에서 국가를 재건하기 위하여 판유리, 시멘트, 비료가 결정되어 인천에 판유리공장을 설립하기로 결정되었다. 이 UNKRA 원조에 의한 인천 판유리공장(현재의 한국유리공업주식회사)은 처음에 Frazier-Simplex 회사와 건설계약이 체결되었지만 이 회사가 파산에 직면, 해약하게 되었고 UNKRA가 직접 담당하게 되어 1956년 2월 14일 인천 만석동에서 기공식을 가지고, 파나마공화국의 Vinnel Inte rnational Coorporation과 건설계약을 체결하고 20개월 만인 1957년 9월 30일에 준공을 보게 되었으며 제조방식은 Fou rcault 식으로 생산능력은 연간 130,000상자이었다.

이와 거의 같은 시기에 맥주병 생산을 위한 자동 병유리 공장이 건설되었다. 1955년 말 현재 전국유리공장의 수는 41개 에 달하였지만 그 대부분이 가내수공업적인 소규모공장이었고, 또 거의가 파유리를 원료로 하는 재생공장에 불과하였 다. 이러한 상황에서 맥주생산에 따른 맥주병의 수요가 급증하였으므로 부산에서 유리를 생산하고 있던 해남초자가 정부 및 FOA(Foreign Operation Administration)와 협의하여 ICA 자금으로 서울 영등포 당산동에 당시로서는 최신식 자동시설을 갖춘 병유리 공장을 195 6년 10월에 착공하여 1957년 5월 31일 준공하였다. 이 공장이 대한유리공업주식회사로 개칭되었다가 후에 두산유리공업회사에 흡수된 유리병 최초의 근대식 자동 병유리 공장이다. 대한유리는 1959년에야 생산을 개시하였으나 주한 UN군 에서 유출되는 고병으로 인하여 맥주병의 수요가 적어 곧 운휴되었다가 1962년 고병문제가 해결되면서 재가동, 본격생산에 들어갔다. 이 두 공장이 실질적으로 우리나라 유리공업을 근대화 시키는 기반과 원동력이 되었다.

그 이후 한국유리공업주식회사는 ㈜금강의 출현으로 상설전시장을 더 개설, 1989년에는 군산공장 새마을회관3층에 마련한 200평규모의 전시장을 시작으로 여의도사옥, 건설회관, 전국경제인 연합회 건물에도 전시장을 개설 운영하였다. 이어 1990년에는 대전사옥준공과 함께 영업소에 전시장을 또하나 마련함으로, 대구,광주,강릉 영업소를 포함하여 9개 장소에 상설전시장을 운영하게 되었다.

해방 후 유리의 발전

1980년대 중반, 현대그룹 관련회사인 (주)금강(현,KCC)이 연간 1,000억원 규모로 추정되는 국내 유리시장에 참여한다고 선언함으로써 국내 유리산업계의 새로운 파란을 예고 했다.1986년 3월(주)금강은 세계 굴지의 유리제품 생산업체인 프랑스 상-고방 그룹의 판유리 제조기술을 도입하여 국내 유리산업에 진출하겠다고 선언하면서, "1988년 여주에 대규모 판유리 생산공장을 짓고 자동차 안전유리도 함께 생산하기로 했다." 라고 밝혔다. 그러나 자본력을 갖춘 금강은 1987년 8월에 자동차용 안전유리를, 1988년 8월에는 판유리생산을 시작함으로써 그 실행을 당초 계획보다 앞당겼다. 이로써 우리나라 유리산업은 30년 가까이 유지돼 온 한국유리 독점시대가 끝나고 과점경쟁시대로 전환, 바야흐로 한국유리와 금강의 2파전 시대로 돌입했다.

금강이 여주에 공장을 짓고 빠른속도로 전국적인 판매망을 갖추어 나가는 동안, 한국유리는 그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면서도 정작 적절한 대응책을 마련하는데는 다소 안일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한국유리의 대리점으로 지정 받기 위해 수많은 판매상이 줄을 서는 상황이 계속된 것도 방심하게 만든 요인 중 하나였다. 또 한국유리와 대리점간에 30년 동안 쌓아온 정(情)과 의리를 믿는 마음도 위기감을 무디게 만들었다.

이러한 방심과 낙관의 바닥에는 동성판유리 합병 이후 오랫동안 독점체제에 익숙해진 한국유리인들의 타성이 깔려있었다. 그러나 막상 금강에서 제품을 출시하자 대리점 하부에 있던 중도매상들 중 굵직굵직한 판매상들이 줄줄이 금강으로 이동하는 현상이 발생했다. 금강은 보온단열재, 내장재등 건자재 분야에서 축적한 경험과 현대그룹 계열사인(주)현대건설의 지원을 배경으로 한국유리의 아성을 뚫고 시장을 잠식하기 시작했고, 두 회사 간에는 곧 치열한 판매경쟁과 증설경쟁이 벌어졌다.

경쟁이 치열한 만큼 판매망의 '수성'과 '개척' 을 놓고 크고 작은 잡음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유리가 대리점 끌어안기에 주력하는 사이 1992년 중반까지 금강은 한국유리의 대리점과 거래하던 큰 중도매상을 대부분 흡수해 갔다.

금강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공격적 증설을 이어갔다, 여주의 제 1공장에 이어 1989년 2월 850억원을 투입하여 제 2차 플로트유리공장 건설을 시작 1990년 10월에 완공한 것이다. 제 2공장 완공으로 금강의 플로트유리 생산능력은 연간 550만 상자 수준으로 늘어났다. 또한 1990년 상반기에 약 400억원을 투자해 연간 100만 상자 수준의 무늬유리 라인을 추가로 설치, 1991년까지 판유리 생산능력을 연간 650만 상자로 끌어올렸다.

한편, 한국유리는 같은 시기인 1991년에 군산 플로트유리 제 3공장을 준공하고 가동을 시작함으로써 모두 5개 라인에 연간 판유리 1,260만 상자의 생산능력을 갖게 되었다. 이렇듯 경쟁사 사이에서 시설확충이 계속된 결과 1991년네 국내 업계의 유리 제품 생산능력은 약 1,900만 상자에 이르렀고, 이제 비해 같은해 국내 수요는 1,500만 상자 내외로 수출분 70만 상자를 포함해도 300만 상자 가량의 공급과잉 상태가 되었다.

한편 1990년대 초반으로 접어들면서 국내 유리산업계에도 1980년대 초 수입자유화 조치 이후 수입제품과의 경쟁은 피할 수 없는 시대과제로 대두했다. 개방의 물결에 따라 밀려온 수입제품은 기존 시장의 질서를 흔들며 새로운 경쟁 구도를 형성해 나갔고, 이에 따라 저가의 중국산 수입제품은 국내 유리 제조업체의 전반적 경영악화를 부추기는 주요 요인으로 떠올랐다.당시 중국 내 판유리공장에서 생산된 질 낮은 판유리는 국내 시장에서 국산의 70~80% 가격으로 거래되었는데, 특히 건축현장에서 주로 쓰는 3mm,5mm규격에서 중국산이 대거 반입되어 시장을 잠식해 나갔다.

중국 판유리 시장은 1990년 말까지는 세계시장의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2000년 이후 경이적인 경제성장률과 베이징올림픽 특수 기대 등으로 판유리 뿐 아니라 전 산업분야에서 세계의 공장으로 부상하고 있다. 2006년말 약 143개의 플로트라인이 있어 년간 약23백만톤의 생산능력을 보유하고 있고, 2007년에는 160개의 플로트 라인을 가지고 있어 년간 약 27백만톤의 생산능력을 가진 맘모스급 규모이다. 2016년 기준으로는 340개의 생산라인을 가지고 있으며 년간 약 59백만톤의 생산능력으로 전세계 절반의 생산능력을 가진 세계 최대의 공급과잉국가이다. 1997년 IMF 이후에 수입유리가 국내 판유리 사장에서 성장을 계속해오는 동안에 국내 판유리 제조업체는 지속적으로 원가혁신을 하면서 적극 대처하고 있으며 덤핑 수입품으로 인한 저가 공세에도 왜곡된 시장 가격 방어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또한 판유리산업의 질적,양적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신가공기술개발, 제품의 기능 및 디자인을 개발하여 저급저가의 중국산 판유리와 고급 정밀제조의 일본산 판유리 사이에 국내 산업이 찾아가야 할 방향을 연구하고 있으며, PDP유리 및 에너지 절약을 위한 로이유리(Low-E), 안전성능을 높인 접합유리, 화염과 복사열까지 차단하는 방화유리까지 현재도 고부가가치 제품을 계속해서 연구개발하고 국내 시장에 범용화를 시도할 뿐 아니라, 세계 시장에 수출하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다.

이화학용 유리

이화학용 유리는 해방후 수요가 급증한 앰플, 주사기, 페니실린병 등 의료용 유리기구 출현에 자극을 받아 개발 욕구가 컸다. 이에 대한 연구개발은 당시 관록과 업적을 크게 인정받고 있던 국내 유일의 연구기관인 「국립공업연구소」(현 국립공업시험원) 요업과에서 이루어졌으며, 1953년에 당 연구소에서는 앰플유리제조, 내산법랑제조 등에 대한 연구가 발표되었다. 당시 앰플유리 생산업체로 제품품질은 크게 떨어지나, 서울에 1개소, 부산에 3개소가 이었다. 본래 앰플유 리는 우선 유리관을 만든 다음, 이를 가공하여 제조된다. 따라서 앰플제조용 유리관은 그 재질은 물론 유리관의 지름 및 살두께의 균일성이 매우 중요시 된다.

인공적인 성형방법으로는 한 사람이 파이프로 불어 만든 둥근 유리를 다른 한 사람이 작은 원판이 붙은 철막대로 반대 쪽에 부착시킨 후 두 사람이 서로 대칭적으로 후진하여 늘어뽑은 소위 「블로잉 후진법」(blowing 後進法)에 의한다. 이에 인공적으로 성형된 유리관은 균일한 치수로 되기가 매우 어려우며, 한편 앰플가공을 위한 공급수량 충족에도 문 제가 된다. 즉, 앰플 수요증가로서 자동 앰플관 제조기를 도입 사용한 때에는 수요량 및 균일한 치수의 유리관 공급을 위해서 자동 유리관 제조시설이 불가피하다.

유리관 형태로 만드는 것으로써 앰플생산에 앞서 형광등의 수요가 컸다. 처음에는 이 유리관도 앰플 때와 같이 블로잉 후진법에 의하여 제조, 공급되었지만 수요증가와 더불어 품질 및 치수의 균일화가 요구되어 1964년에 이미 댄너식의 유리관 제조시설이 한국유리에 국내 처음으로 도입되어 1965년부터 가동되었다. 또한 유리의 재질은 일반 소다석회유리에서 붕규산유리로 바꾸어 앰플용 유리관을 같은 방식으로 인관(引管)하는 시설이 1968년에 건설되어 이때부터 앰 플유리관의 연속 자동 인관시대가 시작되었다. 따라서 자동화에 따른 유리소재의 양적 충족을 위하여 도가니 용융에서 탱크용융으로 전용되는 등 자동성형기에서 성형되는 품종이 점점 늘어나게 되었다. 이때부터 각종 조명 등 유리도 자 동화 추세를 보이게 되었다.

한편 비이커 플라스크 등 실험용 이화학용 유리의 생산은 앰플 주사기 등 의료용 유리 생산 시기와 거의 같다. 용도상 의 성격으로 보아 이화학용 유리는 의료용유리 보다 내식성과 내열성 및 내열충격성이 더욱 엄격히 요구된다. 따라서 당시 수입되는 파이렉스유리(우리나라에서는 속칭 “내열유리”라는 대명사로 알려지기도 했다)때문에 미군이 폐기하 는 페니실링병 등을 수집하여 이를 재용융해서 만드는 국산 상품은 거의 각광을 받지 못하였다.

「光明理化유리」 등 국내 생산업체에서는 국내에서 생성되는 이화학용 유리를 파이렉스유리의 이름을 본딴 「코렉 스유리」(Korex glass)라는 상품명으로 붙이기도 했다. 이 파이렉스유리는 열팽창 계수가 작은 붕규산유리로 이루어 진 것이다. 따라서 국내에서도 점차 원료조합에 의한 이 계열의 유리 개발이 이루어지는 경향에 있었고 더불어 주방용 기로의 활용, 자동차 앞 라이트유리, 가로등 외피유리 등으로의 수요증가로 내열성을 보다 중요시하는 방향으로 발전 되어가고 있으며, 다시금 현재 수요가 급증하고 있는 전자렌지용 유리기구로서의 저팽창성유리에 까지도 국산화가 이 루어지고 있다. 이들 저팽창성, 고내열성의 공업용유리는 대량 생산제 탱크가마에서도 생산이 계획될 만큼 수요량도 크게 증가하고 있다.

섬유유리

섬유유리는 일반적으로 파유리를 용융하여 고속 회전판에 낙하시켜 원심력에 의해 섬유화하는 단섬유유리(유리면이 라고도 함)와 역용성의 암석을 용융하여 같은 방법으로 섬유화한 암면(岩綿)으로 생산되어, 주로 에너지절감용 단열 보온재용으로 각광을 받아 왔다. 현재 국내 생산업체로는 「주식회사 KCC」, 「한국하니소」, 「한국인슈로」, 「동양 유리섬유」, 「주식회사 벽산」 등이 있다. 단열보온재용 섬유로는 종래에 섬유길이가 너무 짧아 활용성이 적은 우리 나라 석면을 이용하여 왔었는데, 후에 생산하기 시작한 유리섬유가 석면보다 효능이 월등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 그렇 지 않아도 발암성 문제로 대체품을 강구하던 차에 석면 대체의 불연성의 단열 보온재용으로 많이 쓰이게 되었다.

한편, 알미늄보다 가볍고 철보다도 질기고 강한 대표적인 복합재로인 FRP(엄격히는 GRP이며 Glass Flber Reinforce d Plastic)라는 신제품이 출현함에 따라 이의 보강재로서 사용되는 장섬유유리(유리섬유라고도 함)가 우리나라에서도 「럭키화학」(현 LG화학)의 예천공장을 시작으로 장섬유 유리공장이 설치되어 낚시대, 보트 등 FRP제조 원료로 쓰이 게 되었다. 현재 국내 생산업체로는 「주식회사 엘지」 「한국화이버」 등이 있으며 이외에 「한국베트로텍스」에서 도 1993년부터 공장을 설립 생산에 나서고 있다. 이와 같은 장섬유유리, 단섬유유리 등의 수요가 증가됨에 따라 섬유유 리공장은 급격히 신설 또는 확장되어 왔다.

유리섬유 중에서 석영유리 섬유는 빛의 전달 성능이 동선(銅線)보다 수백배나 우수하여 광통신용으로 각광을 받게 되 어 종래의 동선재료와 점차 대체되어 가고 있는데 국내에서도 이 광통신용 광섬유의 제법을 개발, 생산하여 수출까지 도 하고 있다. 현재 국내 생산업체로는 「엘지전선」 「삼성반도체」 「대우통신」 「대한전선」 등이 있다.

광학유리는 해방 후 얼마 되지 않아 국내 처음의 광학유리공장으로 「고려광학초자(高麗光學硝子)」를 설립한 바 있 으나 모(母)유리를 생산하지는 못하였고 가공도 만족할 만큼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후 모유리의 수입에 의한 광학유 리의 가공만큼은 활발해졌으나, 모유리의 생산만은 못하고 있다. 원래 광학유리는 안경유리와 같이 수요가 많은 것도 있으나 대체로 수요가 적은데다 종류가 많고 또한, 다른 종류의 유리에 비하여 매우 정밀 처리를 요하므로, 한 종류의 광학유리만으로는 수요량이 적고, 그렇다고 여러 종류의 광학유리를 만들기에는 과다한 설비가 요구될 뿐 만아니라 세계시장을 상대로 한 생산을 해야 한다는 어려움이 수반된다. 그러나 인산염유리 非산화물유리인 플로오루화유리 등 새로운 기능을 지닌 유리 즉 새로이 특성화된 필터유리, 레이저유리 등 여러 종류가 출현되고 있어서 선진국 진입을 위 하여 광학유리에 대한 조속한 개발이 절실히 요망되고 있다.

광섬유용 모유리인 石英유리는 광섬유로서뿐만 아니라 내열성, 내식성, 기타 공업용 등 용도가 많은 중요한 소재이기 는 하지만, 아직 수입에만 의존하고 있으므로 조속한 국산화가 요망된다. 해방 직후 광학유리를 만드는 회사로서, 수입 한 유리소지를 가공만하여 제품을 생산하던 「고려광학초자」가 설립되어 있었으나 활발하지는 못하였다. 현재까지도 광학유리소지의 국산화는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광학유리

인산염유리 및 非酸化物系인 플르오르화물유리, 칼코게나이드유리 등의 재질로서 만들어지는 새로운 기능을 지닌 품 종, 즉 새로운 특성을 갖춘 필터유리, 레이저유리 등이 선진국에서 많이 출현하고 있어서 광학유리의 국내 개발이 시급히 요구된다.

TV용 CRT유리의 생산은 「삼성코닝」에서 처음 시작하였다. 초기에는 수입한 특질 유리관을 접합공정만으로 제작하 였으나, 얼마되지 않아서 흑백 TV용 브라운관유리를 생산하였고 이어서 「한국유리」계 회사인 「한국전기초자」에 서도 같은 CRT유리를 생산하였다. 이 흑백 TV용 CRT는 칼라TV의 보급으로 얼마간 수요가 줄어들기도 하였으나, 컴퓨 터의 급격한 수요증가로 인해 도리어 공급부족 현상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광학적 균질성을 생명으로 하는 광학유리는 응용상 주를 이루는 안경유리이다. 광학유리 제품 생산에는 우선 유 리소지의 개발과 섬세하고 염격한 가공 기술의 개발로 대별된다. 이점에 있어서 국내에서는 유리소지를 전적으로 수입에만 의존하고 있고 다만 후자인 가공 공정만을 거쳐 제품을 생산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정 밀성과 엄격성이 미흡하다. 하지만 우선적인 것은 전자이다.

현재 광학유리의 종류는 약 200종 이상으로 소형다품종이고 안경렌즈와 같이 수요가 많은 것도 있어 수입대체를 위해서도 광학유리소지의 국내 개발이 시급히 요구된다.

유리병, 용기유리, 유리식기

재질적으로는 주로 소다석회 유리이며 특수한 제품으로서 크리스탈유리, 또는 반 크리스탈유리 등의 것도 있다. 특히 일반 병유리의 품질은 거의 국제적인 수준에 달하고 있으며, 따라서 상당량의 수출도 이루어지고 있다. 최 근에 알루미늄캔, 폴리에틸렌용기, 종이팩 등에 밀리는 듯한 경향을 보이기는 하나 위생면으로 보아 음식물, 약 병의 꾸준한 증가에 따라 그것들의 수요는 여전히 증가하고 있다.